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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관찰의 현장에 관찰자로서의 (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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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문사 작성일2016.12.22 조회5,6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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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관찰의 현장에 관찰자로서의 <나>가 없는 것이다.

 

아무 생각도 끼워 넣지 말고 전체의 흐름을 그냥 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특별한 방법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거기엔 특별한 방법이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 이 말을 행여 '어떻게 하라'는 식으로 듣고 그렇게 하려고 애쓴다면, 그 말의 뜻을 전혀 모르고 계속 하던 습관대로 제자리에서 쳇바퀴 돌 듯 하는 거요. 있는 그대로 그냥 보라는 것은 절대로 여러분한테 강제하는 것이 아니오.

 여러분이 있는 그대로 보는 과정에서, 털끝만큼도 여러분 자신의 의식의 흐름에 어떤 강제성을 띈다든가, 의지력이 개입한다든가, 어떤 의도하는 바가 있으면, 그건 전혀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은 아무 것도 요구하는 마음이 아니요, 아무 것도 바라는 마음이 아닌 거요.

 우리 마음이 움직이거나 동요하는 것은 뭔가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마음은 전혀 동요하지 않아요. 그러면 여러분은 뭘 요구하고 있을까요?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고 그 알아들은 바에 따라서 자기가 그린 어떤 상태, 그것이 자유로운 상태가 됐건 끄달리지 않는 상태가 됐건, 그러한 것들을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어때요? 그런 것을 요구하지만 뜻대로 잘 안 되지요? 그러니까 그것 때문에 또 안 된다고 동요하고 그러는 겁니다.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마음은 근본적으로 동요할 일이 없는 거요. 동요 안 하니까 가라앉힐 것도 없겠죠? 억누를 것 없고. 하지만 여러분은 뭔가에 마음이 동요되면 그걸 가라앉히고 억누르려고 스스로를 들들 볶는 게 일상이 돼버린 거요.

 그러니 '그냥 보라'고 하는 말의 뜻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그냥 보려고 하는 거기에 털끝만큼이라도 어떤 의도가 개입해 있으면 그건 그냥 보는 게 아니오. 속셈이 있는 거요. 뭔가 어떻게 되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소리요. 지금 내 마음이 가령 동요하고 있는데, 그것을 동요하지 않는 마음, 가라앉은 마음, 고요한 마음으로 바꾸려는 속셈을 가지고 보고 있다면, 그건 있는 그대로 보는 그 행위가 어떤 방편이 돼버린 거요. 고요한 마음으로 바꾸기 위한 방편. 내가 하고 있는 얘기를 어떤 방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은 속이 시커먼 사람이요. 속셈이 있는 사람이라 소리요. 옛 선지식들의 말씀을 보다 나은 자기 자신을 실현하기 위한 방편쯤으로 여긴다면 천 년, 만 년을 닦아도 가망 없는 거요.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이미 그 관찰의 현장에 보는 '나', 다시 말해 관찰자로서의 '나'가 없다는 소립니다. 보는 '내'가 있으면 필연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이름을 짓게 돼요. 우리의 관찰방법이라는 것은, 의식 무의식간에 그렇게 관찰자와 관찰대상으로 틀 지워져 있는 거요. 그리고 늘 관찰자의 자리에 '내'가 처하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 관찰자가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 어떤 생각도 그 흐름에 대해서 좋다거나 싫다거나, 이치에 합당하다거나 합당치 않다거나 하는 등의 군소리가 전혀 붙을 여지가 없다 소리요. 그렇게 이치에 합당하고 합당치 않은 일체의 논리 체계, 일체의 가치체계의 집합인 '나'가 활동을 멈추는 겁니다. 활동을 멈추면 이제 그 사고의 흐름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할 놈은 아무도 없는 거요. 사고가 활동을 멈췄다는 것은 기존의 모든 기억이 다 숨죽였다는 소립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건 어떤 거냐고 많이들 묻습니다. 왜 이 말을 이해하기가 그렇게 어려울까요? 이 말은 전혀 어려운 말도 아니고, 아무 노력도 시간도 필요 없는 말인데 왜 어려운가? 그건 그 마음 자세 때문이오.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도록 틀 지워지고, 굴레가 씌워진 그 마음 때문이오.

 무슨 소린가? 가령 '나는 지금 혼란스럽다'고 할 때, 혼란스럽다고 말하는 그 자체가 벌써 비난이기 때문이에요. 이미 비난을 해버렸기 때문에 그 혼란의 본질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는 놓치게 되는 겁니다. 혼란, '그건 천하에 몹쓸 것'하고 당연하게 외면해버린다 소리예요.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을 기존의 기억을 덧씌워 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는 겁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그냥 보세요. 거기에 즐거움이니 괴로움이니 하는 이름 따윈 짓지 말고 그냥 봐요. 절대로 생각을 끼워 넣으면 안 됩니다.

 자아를 소멸한다는 것은 생각을 소멸한다는 것과 마찬가지 말입니다. 심리적 물리적 모든 대상을 아무런 생각을 끼워 넣지 않고 그냥 보게 되었을 때, 거기엔 '자아'라는 자취가 사라져서 뭔가를 보고 이러쿵저러쿵하던 모든 문제들이 근원적으로 해소되는 거예요. 애당초 문제가 문제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환히 밝혀지면, 풀어야 할 문제가 없어지고, 그러니 저절로 모든 매듭이 빙소와해(氷消瓦解)하듯 해소되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전엔 아무리 지워버리려고 해도 안 되던 놈이, 내가 아무 노력도 안 하고 아무 바램도 끼워넣지 않고 추구하지도 않고 그냥 가만히 있으니 저절로 사라져버려요. 그렇게 되면 또 십중팔구 금방, "야, 요거로구나!" 하게 될 거요. "야, 이렇게 깨끗하고 맑은데, 정말 좋구나! 이걸 어떻게 하면 지속시킬 수 있을까?" 하게 되면 그건 참된 고요함이 아니고 벌써 사고가 활동을 시작한 겁니다. 여기서 대개 또 시궁창으로 처박히고 마는 거요. '내'가 사고의 활동을 시작한다는 생각도 없이 자동으로 활동을 시작한 거라 이 얘기요. 십중팔구 여기서 속게 됩니다.

 그렇게 의식이 활개를 치다보면 또 예전같이 뒤죽박죽이 되겠죠? 뻔해요. 그러다 보면, "아이구, 또 놓쳤어. 아까는 맑았는데 지금은 또 이러네?"하면서, 지금 '이런 것'을 아까의 그 맑은 상태로 되돌리려고 또 야단이오. 거기에는 이미, 있는 그대로 그냥 보는 것은 없는 거요. 그땐 '그냥 보라' 소리는 귀에도 안 들어와요. 아까의 그 기막힌 체험에 마음이 꼴딱 빠져서, 고요하고 맑은 그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아까 어쩌다 그렇게 됐지?"하면서 안간힘을 써요. 그쯤 되면 온통 뒤죽박죽 돼서 출구가 안 보여요. 생각으로 암만 더듬어 봐야 헛일인 거요. 그럴 때, 지금 출구를 찾으려고 그렇게 더듬고 있고, 맑고 깨끗한 예전의 상태로 되돌리려고 애쓰고 있는, 말하자면 함정에 빠져버린, 함정에 빠져서 허덕이고 있는, 그 전체를 그냥 보라 소리요. 그것이 가장 주의 깊은 상태이고 그것이 가장 맑은 상태인 거요.

 가장 신성하다고 여기는 그 어떤 종교적인 체험에도 속지 마세요. 모든 경험, 모든 체험은 환각의 소산물인 거요. 우리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을 체험합니다. 진리는 우리 의식의 영역 안에 들어올 수가 없어요. 우리의 정신활동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 밖에 있는 것은 우리의 인식 기능이 아무리 우수해도 구조적으로 미칠 수가 없는 겁니다.

 '본래적인 고요함'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있는 그대로 봤을 때, 거기에 지금까지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고요함이 나타난다'고 하는 그 고요함은, 지금 우리가 통상적인 언어로 해석해서 짐작할 수 있는 그런 고요함이 아닌 거요. 그 고요함은 자아에 의해서 경험되어지는 그런 고요함이 아니오. 그것은 그야말로 '불가사의(不可思議)'라, 사량분별이 아득히 미치지 못하는 것이오.

 그래서 아촉불국을 보았다 하더라도 얼른 지나쳐버리라는 말도 있는 겁니다. 아촉불국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상상해낼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세계 아닙니까? 불국토, 극락. 그 '불국토가 현현(顯現)됐다 하더라도 얼른 지나쳐버려라.' 왜인가? 그렇게 형상 있는 것, 모습 있는 것, 나에 의해서 인지될 수 있는 것, 그 모든 것은 '그대 망상의 산물이니라' 그런 말이오. 우리가 뭔가를 본다, 뭔가를 인식한다는 것은, 기존에 자기가 그린 것을 보는 것입니다. 거기엔 예외가 없어요. 우리가 뭔가를 인식한다 하는 것은 과거의 기억을 보는 거요.

 이 말은 우리가 인식수단을 통해 알게 된, 이러쿵저러쿵하던 모든 허망한 짓거리에 종지부를 찍으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경험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경험하기는 경험했는데 사실은 경험한 자도 경험한 바도 전부 한 마음이 지어내는 허망한 그림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내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확연히 들여다보는 사람은, 종일 하루 경험해도 그 경험이 이 마음 가운데 자취를 남기질 안아요. 그것이 물들지 않는 청정한 마음인 거요. 시궁창 속에서 꽃을 피워도 물들지 않는다는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본인이 의식했건 안 했건 끊임없이 갈구하는 어떤 바람직한 모습이 있습니다. 그게 망념이고 망상이에요. 결국 우리가 인생이라고 하는 그것의 실상을 완전히 드러내놓고 보았을 때, 이게 얼마나 엄청난 속임수인지, 또 우리가 얼마나 허망한 일에 들떠있었는지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럴 때 "허허" 하게 되는 거요. 그럴 때 비로소 진실이 드러나요. 우리 눈앞을 가리고 있던 것이 얼마나 엄청난 망상의 두껍고 두꺼운 장막이었던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요.

 어느 날 제자가 한 소식했다고 신이 나서, 스승한테 인정을 받으려고 막 삼 배 하고 말을 꺼내려고 하는데 냅다 방망이질을 당했어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 ·

  "나는 아직 얘기도 하지 않았는데 왜 때리십니까?"
  "네 말, 끝까지 다 들을 이유가 뭐 있어?"

 깨달았다는 것, 그게 전부다 자기 환상을 재확인하는 것에 불과한 거요. 그 사실을 깨닫는 게 바로 깨닫는 겁니다. 그동안 자기가 뒤집어쓰고 있던 허물, 자기를 후끈 달게 만들었던 것들을 전부 벗어 던지고 다시 눈을 비비고 봤더니, "어? 지금까지 헛짓했네?" 그게 깨달음이오. 뭐 중뿔나게 남들이 모르는 신통하고 묘한 무언가를 얻어서 어떻게 되는 게 아니라 소리요.

 켜켜로 쌓였던 그 두꺼운 장막이 걷히고 나면, 내가 본래 부처였었는데 괜히 들들 볶았던 거요. 그러니 따로 성불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성불하려고 기를 쓰니까 부처라는 이미지가 나를 홀리고, 깨달음이라는 이미지가 나를 홀리는 거요. 그런 모든 현상이 일어나거든 그것을 그냥 보세요. 그렇게 하고 있는 그 전체 과정을 그냥 통찰하세요. 그러면 이른바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의 실상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전부 내 마음이 진실을 있는 그대로 조화롭게 보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갈등, 모순, 투쟁이에요. 깨고 나면 그게 전부 까닭 없는 거요. 그러한 사실을 깨달았을 때, 원초적이고 본래적인 고요함은 늘 거기에 있었던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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