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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이 몽땅 빈 것이면, 구체적으로 무슨일이 일어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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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문사 작성일2016.12.23 조회5,8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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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귀(知歸)


2) 법문(法門); 몸과 마음이 몽땅 빈 것이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지금까지 몸과 마음, 또 그 몸과 마음에 의해 인지되는 모든 대상들, 객관 경계가 전부다 허망해서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수도 없이 드러내 보였소. 그 중에서도 특히 이 몸과 마음이 전혀 의지할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가장 중요하오. 눈, 귀, 코, 혀, 몸(眼耳鼻舌身)을 계속 굴리기는 굴리는데 굴리는 주재자(主宰者)가 없다는 얘기요.

왜 그렇겠소? 눈, 귀, 코, 혀, 몸이라고 할 만한 게 없기 때문이오. 눈, 귀, 코, 혀, 몸 뿐 아니라 일체 만법이 자체의 성품이 없소. 전부 인연화합으로 되어있을 뿐, 그 스스로 성립되는 건 아무 것도 없는 거요. 그 스스로도 존재하지 못하고 그 스스로도 성립되지 않거늘, 하물며 다른 것과 교섭한다든가 작용을 일으킨다든가 하는 일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오.

그런데도 우리 모든 범부들은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見聞覺知) 그 중심에 허망하게도 '나'라는 주재자를 설정한 거요. 그래서 '내'가 본다, '내'가 듣는다, '내'가 한다는 식으로, 순전히 사고(思考)에 의해서 빚어진 전혀 허망하고 아무 의거할 것이 없는 '나'라는 걸 만들어놓고 수천만 년 동안 그 허망한 '나'를 중심으로, '나와 너', '내 것과 네 것' 등등의 숱한 분한(分限)을 지어놓고 수많은 갈등을 빚어냈던 거요.

그러니 무엇보다 먼저 그 모든 갈등의 원흉인 '나'와 '내 것'이라는 생각을 송두리째 뽑아 없애야 하지 않겠소? 그래서 마침내 모든 걱정과 시름의 원인이 되는 이 몸과 마음이 없는 자리에 이른다면 얼마나 자유롭겠소?  누가? ...... 고삐를 바싹 잡고 정신차려야 하오. 그 '나'라는 놈의 뿌리가 그렇게 엄청나게 깊고 질긴 거요. 눈 깜박할 사이 어느새 모든 생각과 행위의 중심을 다시 그 '나'라는 놈이 차지하고 있지 않소? '나'라는 놈을 뽑아 없앤다느니 자유로울 거라느니 하는 생각의 중심엔 벌써 '나'라는 놈이 버티고 있는 거요. 심지어 그놈을 부정하는 그 순간에도 말이오. 결국 그 생각의 중심에 '나'가 없으면 부정도 긍정도 있을 수 없는 거요. 그러니 이 길이 얼마나 삼엄하고 투철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오.

자유롭고자 하고, 시간 공간적인 그 어떤 제약에서도 벗어나고픈, 이른바 영원한 삶, 안정된 삶 등등의 온갖 바람들이 전부 이 몸과 마음에 의거해서 비롯됐던 거요. 그런데 이 몸과 마음이라는 게 전혀 의거할 것이 못 되는, 전혀 마음이 빚어낸 환상이요, 환영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연하게 드러났을 때, 경전에서 읽은 어떤 글귀나, 누구한테서 들은 얘기가 아니고, 직접 자기의 깊고 성숙된 통찰력으로, 도무지 마음이라고 할 만한 마음이 없고 몸이라고 할 만한 몸이 없다는 사실이 확연히 증험되었을 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겠소?

우리의 몸과 마음이 전혀 의거할 것이 없는 것이라면, '나'라는 삶은 도대체 어디에 의지해서 그 삶을 유지하고 있느냐 이 말이오. 몸과 마음이 제 성품이 없는 전혀 가공적인 것이라면, 우리가 순간순간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이른바 삶이라는 이름으로 영위하고 있는 이 모든 생명활동은 도대체 어디에 의거하고 있는 거요?

바로 그때, 즉 아무 데도 의거할 것도 없고, 장소도 없고 시간도 없고 도무지 의지할 데가 없이 막막해져 버린 바로 그때, 비로소 참된 진실이 드러날 가능성이 있는 거요. 그것도 살풋. 아주 순간적으로 잠깐. 찾으면 아무 데도 없지만 인연만 닿으면 뭐든지 나툴 수 있는 그 참된 하나. 흔히 법성(法性)이니 진여(眞如)니 진리니 하는 말들로 불려지지만 그것은 인간이 편의상 갖다 붙인 이름이지, 진여 자체가 스스로 진여라고는 물론 한 적이 없소.

이 몸과 마음뿐 아니라 일체 만유가 비어서 제 성품이 없고, 장소도 없고 방위(方位)도 없고, 시간적인 제약도 없다는 그 사실이 참으로 진실로 사무쳐질 때, 그때 이른바 참된 하나가 우뚝 드러나는 거요. 그 참된 하나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존립할 수가 없소. 일체 만유가 제 성품이 없으니 그 어떤 것도 제 스스로 존립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지 않소? 그런데도 여러분 눈에는 지금 실제로 삶이 영위되고 굴려지고 행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소? 거울 속에 비친 그림자나 허깨비가 어떻게 삶을 유지하고 굴릴 수 있냐는 말이오?

또한 이 몸과 마음이 전혀 실체가 없는 거라면, 그 몸과 마음을 어떻게 갈고 닦고 할 수 있겠소? 여러분이 지금 여기 와서 귀를 쫑긋 세우고 이 얘기를 듣는 이유가 뭐요? 이 몸과 마음을 어떻게 해서든 맑게 한다든가 깨끗하게 한다든가 무애자재한 어떤 경지로 이끌어 올린다든가 하는 뭐 그런 속셈이 있어서 온 것 아니오? 그런데 이 몸과 마음이 전혀 의거할 게 못 되는, 생각만으로 빚어진 그림자 같은 것이라면 도대체 지금 여러분의 이 상황은 뭐요? 비단 출세간적인 거룩한 목표를 지향하는 게 아니더라도, 소위 안정되고 안락한 삶, 행복한 삶, 보람 있는 삶, 그게 전부 무엇에 의해 추구되는 거요? 이 몸과 마음 아니오?  계속 반복하는 말이지만, 그런데 그 몸과 마음이라는 것이 전혀 의거할 게 없는 것이라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하는 것을 지금 깊이 보라는 얘기요.

깨달음이니, 거룩한 목표니, 안락한 삶이니, ... 그런 일 없는 거요. 전부 생각만으로 그랬던 거요. 지금 이 말은 핵폭탄 보다 더 엄청나고 충격적인 거요. 실제라고 철석같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지금 여러분이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이 세상 삼라만상이 몽땅 다 꿈이라 소리요.


몸과 마음이 없으면, 지금이니 여기니 하는 시점(時點), 지점(地點)이 있을 수 없소. 오직 텅 트인 법계(法界)일 뿐이오. 이 '나'가 소멸되면 오직 하나의 참된 법계일 뿐이지, 여기니 저기니, 나니 너니, 먼저니 나중이니 하는 그 어떤 시간, 공간적인 전개가 전혀 근거가 없어지는 거요. 모든 기준이 없어진다는 얘기요. 모든 논리체계나 가치체계 역시 이 몸과 마음을 '나'인 줄로 아는, 전혀 잘못된 출발 때문에 생겨난, 전부 쓸데없는 이론일 뿐이오.

관찰한다는 게 무슨 소리요? 전부 '내'가 보는 바 아니오? 그렇다면 '내'가 본 모든 것, '내'가 관찰한 모든 것, '내'가 들은 모든 것, 그렇게 보고 듣고 궁리해서 깨달아 알아낸 모든 결과는 전혀 가공적이고 근거가 없는 것 아니겠소? 이 사실을 확실히 깨달은 사람은, 새삼스럽게 새로 비울 것도 없이 지금 있는 이대로인 채로, 자신이 그 동안에 꾸역꾸역 긁어모았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 전부 빈 것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소. 아주 흔쾌히 그 자리에서 두 손 툴툴 터는 거요.

지금까지 한 얘기는 엄연히 존재하는 '나'를 없애라는 소리가 아니오. 여러분이 그동안 철석같이 믿고있는 그 '나'라는 존재는 순전히 생각만으로 빚어진 환영이나 그림자 같이 본래 없었던 거요. 그래서 이 몸과 마음이 전혀 의거할 데가 없다는 사실이 확연해 지는 순간, 그 무수한 낱낱의 소중심(小中心)들이 전부다 해소되고, 그때 비로소 본래의 자리로 지귀(知歸)할 수 있는 거요. 하나로 돌아간다 소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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