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쇼-사라하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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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문사 작성일2016.08.20 조회6,231회 댓글0건본문
사라하의 노래
그대 가슴 속의 꽃을 피워라 Ⅱ - 오쇼의 사라하 강의
미혹된 자는
키스의 쾌락을 갈구하며
그 쾌락이 궁극의 현실이라고 하네.
마치 집 떠나는 남자가 문 앞에 서서
여인에게 감각의 쾌락이 어떠냐고 묻는 것처럼
無의 집에서
생물적 힘이 바람처럼 일어나
수 많은 방식으로
인위적 쾌락을 일으켰다네
그리하여 요가 수행자들은
고뇌에 빠져 각성을 잃게 되었나니
이는 천상의 공간에서 추락하여
유혹에 빠져 악업을 짓는 것이네
마치 천상의 공간에서 내려줄
감로수를 위해
쌀과 버터를 제물로 태우는 브라만 사제들이
자기 도취에 빠져 그러한 행위를
궁극의 경지라 보는 것과 같네.
또 어떤 이들은
몸 속의 熱을 점화시켜 정수리까지 끌어 올려
성교하듯이 혀로 목젖을 어루만지며
그런 속박시키는 행위를 해탈의 길인양 착각하네
그리고 자만에 빠져 자신을 요가 수행자라 부를 것이네.
- 탄트라 지도, 사라하
탄트라는 자유다.
마음의 모든 구성물로부터의 자유,
마음의 모든 게임으로부터의 자유,
모든 형태로부터의 자유,
타인으로부터의 자유,
탄트라는 있음을 위한 공간이다.
탄트라는 解放이다.
모방하지 말아라.
그저 흉내장이가 되지 말아라.
붓다가 되려고 노력하지도 말고
예수가 되려고 노력하지도 말라.
창의적이 되라.
무엇을 하든 그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하려고 노력하라.
독창적이고 확실한 그대의 도장을 찍을 수 있또록 노력하라.
마루를 닦을 때 조차도 그대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닦을 수 있다.
요리를 할 때도 그대만의 고유의 방식으로 할 수 있다.
모든 행위를 창조적으로 할 수 있다.
창조적이 되어야 한다.
창조적이면 창조적일수록 좋다.
내적인 체험을 큰 깨달음이라 하여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해탈이란
또 다른 족쇄에 자나지 않는 것.
빛깔이 푸른 유리 장신구가
그들에게는 값비싼 에메랄드
미혹된 사람들은 모르네
그들이 틀림없는 보석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보석이 아님을.
그들은 구리를 황금으로 여기네
산만한 사념을 묶어서
그 사념들이 궁극적 현실이라고 생각하네
그들은 꿈 속에서 경험한 쾌락을 갈망하나니
이제 곧 사라지고야 말 이 몸과 마음을 보고
최상의 영원한 지복이라고 하는구나.
이들은 이봠이라는 만트라의 암송으로
자아 정화가 성취되었다고 생각하네
그들은 자기가 상상한 자연스러움이
네 개의 봉인을 열어주는
특정 상황들이라고 하네
그러나 이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는 것이로다.
미혹에 빠진 사슴 떼가
신기루를 알아채지 못하고
신기루의 물을 향해 돌진하듯이
미혹된 사람은
갈증을 풀지 못하고서
족쇄에 묶인 채로 쾌락을 찾으며
이 모든 것이 궁극의 현실이나고 하네.
경험은 하나의 대상이 되고
'경험하고 있음'은 대상이 아닌 하나의 과정이다.
지식은 대상이고 알아가고 있음은 과정이다.
사랑은 대상이고 '사랑하고 있음 loving' 은 과정이다.
그래서 탄트라는 말한다.
'그대 내면의 본질은 고정된 사물이 아닌
진행상태로 이루어져 있다.
그 안에는 지식이 아닌 -알아가고 있음- 이 있다.
사랑이 아닌 '사랑하고 있음'이 있다.
명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동사만 존재할 따름이다.
이것은 실체에 대한 심오한 직관이다.
오직 동사만이 존재한다.
'이것은 나무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표현이다.
그것은 나무가 아니라 '나무-되고-있음 tree-being'이다.
나무는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는 고정된 사물이 아니다.
'이것이 강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에 불과하다.
그것은 '강 흐름'이다. 강은 흐르고 있다. 강은 역동적이다.
단 한 순간도 똑같지 않다.
그런데 왜 그것을 '강'아리고 부르는가.
심지어는 바위도 바위가 아니다.
그것 역시 진행형이다.
존재는 사물이 아닌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다.
여자에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지 말아라.
그냥 '나는 사랑의 상태에 있습니다'라고 말하라.
사랑은 사물이 아니다.
그대는 다만 사랑의 상태에 있을 따름이다.
그대가 사랑할 수는 없다.
거세된 소는 빈약한 상태이다. 거세된 소는 노예이다.
황소는 아름답다. 황소는 영광스러운 상태이고 눈부신 광휘이다.
홍소가 걷는 것을 보라. 그의 걸음걸이는 참으로 황제 답다.
그리고 수레를 끌고 있는 거세된 소를 보라.
똑같은 일이 인간에게 행해졌다.
성의 본능은 축소되고 단절되고 붕괴되어 왔다.
지금 인간은 황소와 같이 존재하지 못하고
거세당한 소처럼 존재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수많은 수레를 끌고 있다.
성의 억압이나 성의 금기는
인간을 노예화시키는 데 가장 기본이다.
성이 자유롭지 않는 한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다.
성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성장하도록 허용되지 않는 한
인간은 진정으로 자유스러울 수 없다.
다음의 다섯가지 술책을 통해
인간을 노예로 추한 기형아로 변질 되었다.
첫째로 인간을 지배하고 싶다면
가능한 인간의 나약함을 유지시켜라.
인간의 나약함을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온전하게 사랑할 자유를 주지 않는 것이다.
둘째, 가능한한 사람들을 무지하고 혼미하게 해서
잘 속을 수 있게 하라.
그리고 사람을 백치로 만들고 싶을 때-성직자나 정치가들의 결탁에 필수적인-
가장 좋은 것은 사람에게 자유로운 사랑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세번 째 비밀은
가능한 한 인간을 움츠린 상태로 있게 하라.
그 확실한 방법은 사랑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공포를 소멸 시키기 때문이다.
넷째, 가능한 한 인간을 불행한 상태로 유지시켜라.
불행한 사람은 혼미하고 불행한 사람은 자기 존엄성이 없으며
불행한 사람은 자기 비판적이고 불행한 사람은 자기가 분명 뭔가
잘못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불행한 사람은 뿌리가 없다.
그는 여기 저기 떠밀려 아주 쉽게 浮木이 되어 버린다.
불행한 사람은 항상 비난받고 명령받고 훈련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다섯 번째, 가능한 한 사람들이 서로 틀어져서
성직자와 정치가가 원하지 않는 목적을 위해 서로 단결할 수 없게 하라.
이 삶이 유일한 삶이다.
내세는 이 삶 속에 숨겨져 있다.
그것은 이 삶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삶으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다.
그것은 이 삶 속에 있다.
이 삶 속으로 들어 오라.
사회는 그대가 사회의 존경을 갈망하도록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통해 사회는 그대를 지배한다.
사회는 그대가 규정을 따르면 존경하고 규정을 따르지 않으면 모욕한다.
사회는 그대에게 심하게 상처를 준다.
사회의 규정을 따르는 것은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 노예로 만드는 대신 큰 존경심을 지불한다.
하나 그대가 자유인이고자 한다면,
사회는 분노한다.
그러면 그대를 상대해주지 않는다.
자유이이면서 사회에 존재한다는 것은 아주 힘들다.
사회는 자유인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자유인은 사회의 존속을 위협한다.
사회는 항상 대열에 낄 준비가 되어 있는 얼간이들, 기계, 로봇을 좋아한다.
그들은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들은 모방꾼들이다.
그대 자신이 되라.
아무도 그대를 착하게 만들 수 없고,
아무도 그대를 악하게 만들 수 없다.
그대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대를 착하게 만들 수 없고 악하게 만들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