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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문사 작성일2016.07.14 조회6,3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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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心論 (무심론)

釋菩提達磨 製 (석보리달마 제)  (退翁性徹(토옹성철) 譯․評釋(역,평역)


1

지극한 이치는 말이 없으나 말을 빌려야 그 이치가 드러나고, 큰 도는 모양이 없으나 사물을 통해서 그 형체를 드러낸다. 이제 여기 두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고 ‘무심’에 대해서 함께 논해보기로 하자.

 

 

2

제자가 스승께 물었다.

“마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마음이 없다.”

 

“마음이 없다고 하신다면 무엇이 보고 듣고 느끼고 알며,

무엇이 무심인 줄을 압니까?”

 

“도리어 이는 무심이다.

이미 보고 듣고 느끼고 알지만 도리어 이 무심이 무심임을 능히 안다.”

 

“마음이 없다면 지금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없어야 할텐데,

어째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있게 됩니까?”

 

“나는 마음이 없으나,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알 수 있다면 마음이 있는 것인데, 어떻게 없다할 수 있습니까?”

 

“그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그대로가 무심이니,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말고 어디 따로 무심이 있겠느냐. 그대가 이해하지 못할까 하여, 내 낱낱이 설명하여 진리를 깨닫게 하겠다.

 

가령 보는 것을 예로 들어보자. 종일토록 보나 그것은 보는 것 없는 데서 나오므로, 보는 것 역시 무심이다. 듣는 것도 마찬가지로 종일토록 들으나 그것은 듣는 것 없는 데서 나오므로 듣는 것 역시 무심이다. 느끼는 것도 종일토록 느끼나 그것은 느낌 없는 데서 나오므로 느끼는 것 역시 무심이다. 알아보는 것도 종일토록 무엇을 알아보지만 그것은 느낌 없는 데서 나오므로 느끼는 것 역시 무심이다. 알아보는 것도 종일토록 무엇을 알아보지만 그것은 앎이 없는 데서 나오므로 아는 것 역시 무심이다. 또 종일토록 짓고 만드나 짓는 것이 지음이 없으므로, 지음 역시 무심이다. 그러므로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하는 것이 모두가 무심이라고 하는 것이다.”


 

3

“어떻게 무심인 줄을 알 수 있습니까?”

 

“그대가 자세히 추구해보면 된다. 마음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으며, 그 마음이란 것이 과연 얻어질 수 있는 것인가? 마음인가, 마음이 아닌가?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아니면 중간에 있는가? 이렇게 세 군데로 따져서 마음을 찾아보나 전혀 얻을 수 없고, 나아가 어디서나 찾아보아도 아무데서도 얻을 수 없으니, 무심인 줄을 알아야 한다.”

 

 

4

“스님께서 모든 것이 다 무심이라고 하셨으니, 그렇다면 죄도 복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중생들은 육취에 윤회하며 생사가 끊기지 않습니까?”

 

“중생이 어리석어 무심 가운데서 헛되이 마음을 내어 갖가지 업을 짓고 헛되이 있다고 집착하여, 마침내는 육취에 윤회하며 생사가 끊기지 않게 된 것이다.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어두운 데서 나무 그루터기를 도깨비로 보거나 새끼줄을 뱀으로 보아 공포심을 내는 것과 같다. 중생의 망집도 그러해서 무심 가운데서 헛되이 마음이 있다고 집착하여 갖가지 업을 지으나, 실제로는 육취에 윤회하지 않음이 없다. 이런 중생이 만일 대선지식을 만나 지도를 받고 좌선을 하여 무심을 깨치면, 모든 업장이 다 녹아 없어져 생사가 끊긴다. 마치 어두운 곳에 햇빛이 한 번 비치면 어둠이 싹 가시듯, 무심을 깨칠 때 모든 죄가 없어지는 것도 그러하다.”


 

5

“제가 어리석어 마음이 아직도 석연치 않습니다. 6근이 작용하는 모든 곳, 즉 대답하고 말함과 갖가지 움직임과 번뇌․보리와 생사․열반이 무심이란 말입니까?”

 

“그렇다. 무심이다. 다만 중생이 마음이 있다고 헛되이 집착하여 번뇌․생사․보리․열반 등 모든 것이 있게 된 것이니, 만일 무심을 깨치기만 한다면 번뇌․생사․보리․열반 등이 모두 없어진다. 그러므로 여래는 마음이 있는 자를 위해 생사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마찬가지로 보리는 번뇌를 상대로 생긴 개념이고 열반은 생사를 상대로 생긴 개념으로서, 모두가 다스리는[對治] 법이다. 그러므로 얻을 마음이란 것이 없다면 번뇌․보리도 얻을 것이 없고, 나아가 생사․열반도 얻을 것이 없다.”

 


6

“보리도 열반도 얻을 것이 없다고 한다면, 과거 부처님들이 모두 보리를 얻었다는 말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습니까?”

 

“다만 세속 이치[世諦]인 문자로 말해서 얻었다는 것이지, 진실된 이치[眞諦]에서는 사실상 얻을 것이 없다. 그러므로 󰡔유마경󰡕에서도 ‘보리란 몸으로도 얻을 수 없고 마음으로도 얻을 수 없다’ 하였고, 금강경에서도 ‘조금도 얻을 법이 없으니, 모든 부처 여래는 다만 얻을 것 없음으로 얻으신다’ 하였다. 그러므로 마음이 있으면 모든 것이 있고, 마음이 없으면 모든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7

“스님께서는 모든 것이 다 무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무나 돌도 무심인데 어째서 (마음은) 목석과 다릅니까?”

 

“내가 무심이라 할 때 그 마음은 목석과는 다르다. 어째서 그런가? 마치 하늘 북이 전혀 마음이 없으나 갖가지 묘한 법을 저절로 흘려내어 중생을 교화하듯, 여의주가 전혀 마음이 없으나 갖가지 변화된 모습을 자연히 지어 보이듯, 나의 무심도 그러하여 비록 마음이 없으나 제법실상을 잘 깨달아 참된 반야를 갖추어, 3신이 자재하여 응용에 막힘이 없다. 그러므로 보적경에, ‘마음[心意]이 없이 행동을 나툰다’고 하였으니, 어찌 목석과 같겠는가. 이 무심이란 곧 진심을 말한다. 진심이 바로 무심인 것이다.”


 

8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마음 속에 짓는 것이 있으니, 어찌 수행해야 합니까?”

“무엇에서든지 무심을 깨닫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수행이지 따로 수행을 둘 것이 없다. 그러므로 마음이 없으면 일체가 적멸하여 그대로가 무심이다.”

 

제자가 여기서 홀연히 크게 깨쳐, 마음 밖에 물건 없고 물건 밖에 마음 없음을 비로소 알았다. 모든 행동에 자재를 얻어 의심의 그물을 끊고, 다시는 걸림이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어나서 절을 하고 무심을 마음에 새기고는 노래로 읊었다.

 

 

    신령한 마음 아주 고요하여

    빛깔도 없고 형체도 없나니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소리 없어라


    어두운 듯하나 어둡지 않고

    밝은 듯하나 밝지도 않아

    버려도 없어지지 않고,

   가져도 생기지 않네.


   크기로는 법계를 감싸고

   작기로는 털끝도 용납치 않나니

   번뇌로 뒤섞어도 흐려지지 않고

   열반으로 맑혀도 맑아지지 않네


   진여는 본래 분별이 없으나

   유정과 무정을 가려내니

   거둬들이면 아무것도 설자리 없고

   흩어놓으면 모든 중생에 두루하여

   그 신묘함은 앎으로 헤아릴 바 아니며

   정각에는 수행이 끊겼네


    없어져도 그 무너짐을 보지 못하고

    생겨나도 그 이뤄짐을 보지 못하니

    대도는 고요함이여! 모양이 없고

    만상은 그윽함이여! 이름 없어라

    이처럼 자재한 운용이 모두가

    그대로 무심의 정묘[精妙]함이로다


9

스님께서 다시 일러주셨다.

“여러 가지 반야 중에 무심반야가 으뜸이다. 그러므로 유마경에서는 ‘心意도 없고 受行도 없으나 외도를 모두 꺾어버린다’고 하였다. 또 법고경에서는 ‘만일 얻을 마음이 없음을 알면 법도 얻을 것이 없으며, 죄도 복도 얻을 것이 없으며, 생사도 열반도 얻을 것이 없다. 나아가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으니, 얻을 것 없다는 그것마저도 얻을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노래로 말씀하셨다.


 

   지난날 미혹할 때는 마음이 있더니

   이제 깨닫고 나니 무심이어라.

   무심이긴 하나 비추고 쓰나

   항상 고요한 비춤과 쓰임은 그대로 여여하여라.


다시 노래로 말씀하셨다.


   무심하여 비춤도 없고 쓰임도 없나니

   비춤 없고 쓰임 없는 그것이 바로 무위로다.

   이것이 여래의 진실 된 법계라

   보살․벽지불과는 같지 않도다


여기서 무심이란 망상없는 마음을 말한다  


10

또 물었다.  “무엇을 太上이라 합니까?”

 

“太는 크다는 뜻, 上은 높다는 뜻이다. 가장 높은 묘한 이치이므로 태상이라고 한다. 달리 말하자면 太는 크게 통달한 [通泰] 지위를 말한다.  3계의 하늘들이 수복강녕을 누리나 복이 다함으로써 결국 6취에 윤회하게 되니, 크다[太]할 수는 없다.

 

10주보살도 생사는 벗어났지만, 묘한 이치를 다하지는 못했으므로 역시 크다 할 수 없다.  10주 修心도 有를 없애고 無에 들어가, 유무를 동시에 떨쳐버리는 것마저 없긴 하나, 중도를 잊지 못했으므로 그 역시 크다 할 수 없다. 나아가 중도를 잊어 세 곳이 모두 다해야만 묘각의 지위인데, 보살이 세 곳을 다 떨어버리기는 했으나 묘하다는 당처를 없애지는 못했으므로 역시 크다 할 수 없다.

그 묘함을 잊으면 지극한 불도라도 설자리가 없고, 생각을 용납하지 않으면 생각이 없다는 것마저도 함께 잊어서, 心과 智가 영원히 쉬고 覺과 照가 동시에 다하여 적연무위하니, 이것을 크다[太]고 하는 것이다. 太는 이치가 극에 다다랐다는 뜻이며, 上은 견줄 바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태상이라 하는 것이니, 바로 부처․여래의 다른 이름이다.

무심론 1권


 



 

- 無心論 ; 退翁性徹 評釋(퇴옹성철평석) -

 

<無心論>은 대영박물관 소장의 Stein 5619호 敦煌文書(돈황문서)로서 <鳴沙餘韻(명소여운,사진판)>과 <대정신수대장경> 제85권(활자)에 수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고금에 달마 친설로서 공인된 <二入四行論>의 理入, 즉 寂然無爲思想(적연무위사상)으로 일관되어 있다.


1. 迷(미)는 有心이요, 悟(오)는 無心이라 하고, <論>의 맨 끝에서 “무심이란 곧 망상없는 마음을 말한다(言無心者는 卽無妄想心也니라)”고 하였다. 망상에 重(중)과 微細(미세)가 있어서 추중만 없으면 自在位요, 미세까지 없으면 如來位인 바, <논>에서 “이는 여래의 진실된 법계(此是如來眞法界)”라고 하였으니, <논>의 무심은 미세까지 없는 여래위의 眞心으로 佛地이다. <단경>에서 “이 법을 깨친 이는 곧 무념이다(悟此法者는 卽是無念이라)”라고 하였는 바, 무념은 무심이다.


안팎으로 사무쳐 밝아서[妙覺]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알면 곧 무념이다(內外明徹하야 識自本心하면 卽是無念이라)”고 하였으니, 달마의 무심은 佛地임이 한층 더 명백하다. 그러므로 “무심할 수만 있으면 곧 구경이다(但能無心하면 便是究竟이라)”라고 黃檗(황벽)은 말한 것이다.


2. <논>의 맨 끝에서 “깨달음과 비춤이 함께 없어져 적연히 함이 없다(覺照俱盡하야 寂然無爲라)”고 함을 여래라 하고, <이입사행론>에서 “망상을 버리고 진여로 돌아가서 적연히 함이 없다(捨妄歸眞하야 寂然無爲라)”고 함을 理入이라고 하였는 바, 寂然無爲는 무심의 核(핵)이며 達磨禪(달마선)의 極(극)이다. 그러므로 망상이 소멸한 무심도 얻을 수 없음[不可得]이 달마선이니, 망상이 남아 있어서 漸修(점수)를 필요로 하는 解悟(해오)는 달마선의 최대 禁忌(금기)다.


3. <논>에서 말하기를 “무심을 깨치면 모든 업장이 다 녹아 없어져 생사가 끊긴다. 마치 어두운 곳에 햇빛이 한 번 비치면 어둠이 다 가시듯, 무심을 깨치면 모든 죄가 없어지는 것도 그러하다 (覺悟無心하면 一切業障이 盡皆消滅하야 生死卽斷하나니라. 如暗中에 日光一照하면 而暗이 皆盡하나니 若悟無心하면 一切罪滅도 亦復如是니라)”고 하였으니, 철두철미한 頓修思想(돈수사상)이다.

 

<단경>에서도 “한 등이 능히 천년의 어둠을 없앤다(一燈이 能除千年暗이라)”하고, “깨친 이는 단박에 닦고 자성을 단박에 닦는다(悟人頓修 自性頓修)”고 하였으니, <논>의 사상과 완전히 합치된다.


4. <논>에서 말하기를 “모든 일에 있어서 무심을 깨닫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수행이다(一切事上에 覺了無心이 卽是修行이라)”라고 하여 無心三  로 생활원리를 삼았다. 그러므로 망상이 여전한 解悟를 깨달음[悟]이라고 하여 망상 제거를 수행방법으로 삼는 해오와는 天壤之判(천양지판)이 있으니, 이는 敎家行相(교가행상)일 뿐 달마선에서는 異端(이단)이다. 그러므로 <단경>에서 “깨달은 뒤에는 부처님의 행을 수행한다(悟後에는 修行佛行이라)”고 하였는 바, 부처님 행[佛行]은 무심삼매이다.


5. “중생의 불성은 마치 구름에 가린 해와 같아서, 망념의 구름이 다 없어지면 지혜의 해가 바로 나타난다(衆生佛性은 如雲底日하야 妄念雲이 盡하면 慧日이 卽現하느니라-最上乘論)”고 하였으니, 망념이 다 없어지면 무심이요, 지혜의 해가 나타나면 見性이며 眞心이다. <논>에서 “무심이 바로 진심이며, 진심이 바로 무심이다(無心卽眞心 眞心卽無心)”고 하였으니, 무심이 곧 견성이며 진심이다.


6. 그리고 “보살의 지위가 다하여 미세망상을 멀리 여의면 심성을 보게 되는 것이니, 구경각이라 한다(菩薩地盡하여 遠離微細하면 得見心性이니 名究竟覺이니라-起信論)”고 하였는 바, 等覺 이후에 미세망념까지 소멸하였으니 무심이 아닐 수 없으며, 따라서 견성이며 참된 마음이다. 그리하여 표현은 달라도 내용은 일반이니, 무심은 如來地라고 하였으므로 곧 구경각이다.

 

달마는 <논>의 전체에서 여래지의 무심을 내용으로 한 깨달음[悟]만을 인정하였으니, 망상이 여전한 해오로써 견성 운운하는 것은 달마선종이 아니다.


7. “무심지에 도달하여 모든 망념․정습이 함께 없어지고, 지견과 알음알이의 장애가 모두 소멸하니, 다시 무슨 일이 있으리오. 그러므로 남전이 말하기를 ‘평상시의 마음이 도이니라’(到無心地하야 一切妄念情習이 俱盡하고 知見解碍가 都消하니 更有甚事리오. 故로 南泉云 平常心이 是道라)”고 하였으니, 망념․정습과 지견 및 알음알이의 장애가 함께 없어진 무심지만이 평상심이요 그 나머지는 생멸심이다.


8. 끝에서 “太上” 운운한 것은 그 당시 성행했던 道敎思想(도교사상)을 이용한 것이다.


9. 달마는 “좌선토록하여 무심을 깨치게 한다(敎令坐禪하야 覺悟無心이라)”고 하여 좌선을 교시하였으니, 話頭를 참구하여 寤寐一如(오매일여)하고 內外明徹(내외명철)하여 활연히 크게 깨치면 무심 도인이 되나니, 오직 화두 참구에만 노력해야 한다.


10. 돈황석실에서 천년 동안 잠자던 달마의 大法이 이제 靑天白日(청천백일) 아래 드러났다. 이는 宗門 만세의 표준이니, 변질된 異端邪說(이단사설)에 속지말고 이를 지침 삼아 大道를 성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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