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만법이 오직 마음만으로 지은 것이니 모두가 한 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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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문사 작성일2016.06.10 조회6,116회 댓글0건본문
21. 등관(等觀)
2) 법문(法門); 일체만법이 오직 마음만으로 지은 것이니 모두가 한 몸이다.
함께 공부하는 도반들 중에 보면 아픈 사람들이 참 많소. '무릎관절이 아프네', '허리가 절단이 났네' 또 '어디가 어떻네' 하면서, 아픈 곳도 참 많소. 그러나 부처님법을 공부하는 사람이 은연중에라도 이 몸과 마음이 실체로 존재하는 것으로 안다면 그것은 공부의 출발부터 잘못된 거요.
흔히 불가(佛家)에서 '이 뭣꼬?' 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어딘가가 몹시 아플 때, 참된 수행자라면 우선 '아픔이란 뭔가?'에 대한 깊은 참구가 있어야 하오. 가령 무릎관절이 아프다면, '과연 <무릎관절이 아프다>란 뭘까?' 하는 식의 깊은 통찰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오. 당장 아파 죽겠는데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내치는 사람은 수행자가 아니오. 진정한 수행자라면 아플 때가 가장 공부하기 좋은 때라는 것을 알 거요.
대개 사람들이 무릎관절이 아프다고 얘기할 때, 거기엔 '무릎 관절이 아프니까 그 아픔에서 벗어나고 싶다' 라는 생각이 짙게 깔려 있소. '무릎 관절이 아프다, 그러면 무릎 관절이 아픈 원인이 뭔가? 그 원인을 정확히 알아내서, 그 원인을 말끔히 제거한 다음, 그 아픔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대개 이런 구도요. 그러나 이건 출발부터 틀린 거요.
그 이유는 다들 잘 알고 있을 거요. 왜 그렇겠소? 이쯤 되면 그동안 법문을 얼마나 건성으로 들었나 알아야 하오. 오온(五蘊)이 개공(皆空)이라 했소. 몸도 마음도 전부 허망한 거라 소리요. 육체적, 정신적 모든 작용이 몽땅 꿈같고 허깨비 같은 것이니, 한 찰나 한 생각이 지어낸 게 몸이고, 한 찰나 한 생각이 지어낸 게 마음이오.
오온이 개공이니, 환화공신(幻化空身)이니,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니, 그밖에도 얼마나 많은 말들이 있소? 그러한 말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요. 심지어 남들은 모르는 묘한 구절들까지 술술 외면서 멋들어지게 뜻풀이까지 해대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소? 그러나 그렇게 많이 아는 것은, 방해가 되면 됐지 이 공부와 전혀 상관없소. 믿으시오. 이 길은 많이 알아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오. 팔만사천 법문이 모두 한 말씀이니, 그 중 단 한 구절이라도 참으로 깊이 참구해서 과연 그 자리에 계합(契合)하는가 못 하는가가 관건인 거요.
문제는, '<내가 관절이 아프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거요. '이 뭣꼬?' 라는 말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그 진실을 알아봐야 된다는 뜻이오. 이때 편협한 안목이나 자기중심적인 편견으로는 절대로 진실을 제대로 볼 수가 없소. 중생이 성품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중심적인 욕구, 뭔가에 대한 주장이나 혹은 저항, 또는 그 무엇인가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구 등등, 그러한 모든 자기중심적인 욕구들이 자신의 신령스러운 깨달음의 성품(靈覺性)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오.
'이 뭣꼬?' 라는 것은, '이게 무엇일까?' 하는 그 뭔가를 새로 알고 얻어서 '내'가 지혜롭게 되는,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오. '이 뭣꼬?' 라는 그러한 생각을 내는 그것이 '이 뭣꼬?'요. 그건 '알겠다, 모르겠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따위의 알음알이의 내용을 얘기하는 게 아니오. 그런 앎을 굴리고 있는, 지금 그렇게 앉아서 환히 듣고 있는, 소위 그 '앎의 성품'이 무엇인가? 그게 '이 뭣꼬?'요.
빛깔, 소리, 냄새, 맛, 촉감, 일체 존재는 전부 인연으로 말미암아 있을 뿐, 그런 것들을 내는 주체가 있는 게 아니오. 일체 존재는 그 어느 것도 인연화합으로 말미암지 않는 게 없소. 인연화합으로 있다는 것은 그 자체의 성품이 없다는 소리요, 자체의 성품이 없다는 것은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오. 그저 그림자처럼 메아리처럼 있을 뿐이니 그러한 것을 어떻게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소? 실체가 없는 거요.
한 성품이 드러나면 모든 게 다 그림자일 뿐이니 이것저것 가리킬 것도, 구분 지을 것도 없는 거요. 그렇게 몰록 평등한 지혜가 드러나는 것이니, 일체 만법이 평등하다는 등관(等觀)이 확고하게 되기 전에는 한 뼘도 앞으로 나갈 수 없는 거요.
일체가 마음에 비친 그림자일 뿐이면, 우선 '나'와 '너'가 없소.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없고, '아픈 자'와 '아픔'이 없소. 오직 '한 마음'뿐이오. 이 유심(唯心)의 도리가 투철하지 않으면 자성(自性)이 없다는 사실을 확연하게 꿰뚫어볼 수가 없는 거요. 그러나 여러분 눈엔 지금 어떻소? 자성이 없는데도 지금 눈앞에 모든 게 다 있지요? 아픔이 있고, 괴로움이 있고, 기쁨이 있고, 답답함이 있고, 모든 게 엄연히 있잖소? 그렇다면 이런 아픔이니 괴로움이니 즐거움이니 하는 모든 이름과 느낌은 어떻게 생겨난 거겠소? 다만 마음일 뿐이오. 생각만 그러할 뿐이라 소리요.
그러한 생각이 마치 허깨비처럼 나는 거요. 물질도 허깨비처럼 있고, 생각도 허깨비처럼 있는 거요. 아무 것도 실제로 생겨나는 게 없이, 다만 생겨나는 듯 우리 눈에 보이고, 또 그렇게 현혹되는 것뿐이오. 이렇게 일체가 허깨비처럼 나는 마음뿐이요, 생각일 뿐이니, 그것이 지어내는 것들이 어떻게 진실될 수 있겠소? 이렇게 만법이 허깨비요, 그림자면, 마땅히 저절로 등관이 이루어지고, 따라서 세상 만법이 저절로 가지런해지는 거요.
그것 아니면 금세 죽을 것 같았던 모든 것들이, 눈을 뜨고 보니 그게 몽땅 허깨비였음을 알았다면, 그 다음엔 그 본 성품이 환히 드러나기 시작하오. 그 자린 도무지 거치적거릴 것이 없는 허공성이오. 달마대사의 말마따나 텅 트여서 거룩함조차도 없는, 거룩함이니 범속함이니 하는 것조차 우리 인간정신의 산물이라는 걸 확연히 알게 되면, 더 이상 무엇을 지향하고, 무엇을 추구할 것이 있겠소? 그리하여 홀연히 저절로, 저절로 쉬어지는 거요. 이것은 몇 마디 알아듣고 '그럴 것 같다, 그렇다더라' 정도로는 절대로 낌새도 차릴 수가 없소. 스스로 참구가 깊어 바닥까지 완전히 꿰뚫어 체달하기 전에는, 안목이 한 치도 열릴 수가 없는 거요.
만법이 평등하다는 사실을 이치로는 분명히 알아도, 돌아서면 또 다시 모든 게 울퉁불퉁 다르게 보일 거요. 그렇더라도 참구가 깊은 수행자라면 그렇게 울퉁불퉁한 채로 평등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오. 불룩 튀어나온 걸 잘라서 오목한 곳을 메워야 평등해지는 게 아니라, 지금 있는 그대로, 오목하게 패인 거나 불룩하게 솟은 거나, 전부 있는 그대로 환(幻)이고 꿈이라 소리요.
이 세상이 몽땅 꿈이고 환이니, 귀하고 천한 것, 높고 낮은 것, 있고 없는 것 등등, 모든 차별법이 지금 있는 그대로 평등한 거요. 높은 건 좀 깎아서 낮은 데 보태고,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을 다 가지런히 평평하게 하고 난 다음에 평등해지는 게 아니오. '내' 지혜의 눈이 밝아지면 있는 그대로, 한 발자국도 옮기지 않은 채, 만법이 평등하다는 사실이 확연해지는 거요.
이 자리가 되면 모든 번뇌도 보리(菩提)도, 해탈도 열반도, 전부다 끓는 용광로에 흩뿌리는 눈 한 송이오. 이렇게 등관(等觀)이 열리지 않으면 만 경계를 한 마음으로 거두어들일 수가 없는 거요.
일체만법은 자체의 성품이 없는 것이요, 오직 내 마음으로 지은 것뿐이니 전부가 한 몸, 한 권속인 거요. 동체대비(同體大悲)라, 깨달음의 가장 두드러진 일차적인 현상은 일체 만유가 '나'와 더불어 한 몸이라는 사실이 투철하게 와 닿는 것이오. 뭔가 '나는 깨달았다'고 목에 힘이 들어가는 사람은 동체는커녕 점점 더 멀어질 뿐이니, 그게 증상만(增上慢)이오.
그러니 몸이 아프다는 것이 잘못됐다는 소리가 아니오. 이 길에 들어선 수행자라면 모름지기 모습에 마음을 두지 않아야 한다는 거요. 모습이라는 것이, 물질적인 모습만을 이르는 게 아니오. 그 모든 상(相)이 전부 내 마음에 의해서 지어진 바요. 다시 말해, 내 마음에 나타난 그림자라 소리요. 그러니 마음에 비친 그림자에 마음을 뺏겨서야 어디 참된 수행자라 할 수 있겠소? 그래서 참으로 아플 때에 아픔을 보지 않는 것이 참된 수행자가 공부를 지어가는 방식이오.
모습이 모습이 아니라고만 알아 갖고는 아무 소용이 없소. 늘 하는 소리요. '앎이 없는 것'과, '없다고 아는 것'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틀린 거요. 그런데 지금 어떻소? 그렇게 없다고 아는 사람만 판을 치고 있소. 전부 없다고 알고, 비었다고 알고. 참으로 비었고 참으로 없다면, 무슨 이러쿵저러쿵 뒤꼬리가 붙겠소? 그 자리에서 문득 말 길이 끊어지는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