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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문사 작성일2016.04.06 조회6,3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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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말귀

            

             공안(公案)을 화두(話頭)라고도 한다.

이 화두는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을 걸러 내는 체요,

사량(思量)과 분별(分別)을 가려내는 조리다.

화두는 빛깔(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닿질림(觸)과 요량(法)인

육적(六賊)의 침범(侵犯)을 막아내는 수단(手段)의 화살이면서,

아울러 것(色),느낌(受), 새김(想), 거님(行)과 알이(識)인

오온(五蘊)의 난동(亂動)을 무찌르는 방편(方便)의 창끝이기도 하다.

 

생사(生死)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도를 닦는 학인(學人)에게는,

화두가 가장 훌륭한 수단이요 방편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1,700공안인 화두가 다 제각기대로의 뜻길이 다를지라도

필경에는이 뭣꼬?’로 맺어지는 말귀로서

그 말귀 속에는 만고(萬古)의 비밀이 잠겨 있기 때문이다.

 

물론 눈앞에 비치는 한 포기의 풀잎이나, 귓가를 스치는 한 가닥의 소리에도

태고(太古)의 소식이 감돌지 않음이 아니지마는,

그러나 화두는 의심(疑心)을 일으켜서 망상(妄想)을 제거하고

되돌아 이미 일으킨 그 의심처(疑心處)를 풀어 헤치기 위한 말귀라 하겠으니,

바로 허공을 찢어내는 소리라 하겠다.

 

까닭에 여기에 많은 견문(見聞)과 지식(知識)을 갖추어서

바로 의기(意氣)가 충천하는 사람이 있다손 치더라도,

이 화두인이 뭣꼬? ’를 깨뜨리지 못한다면

이것은 한 푼의 값어치도 안 되는 건지혜(乾智慧)인지라,

대사(大事)는 결정짓지 못하는 것이다.

 

참으로 삼계의 화택(火宅)을 벗어나기 위한 공부를 짓는 데에

염불(念佛)· 간경(看經)· 기도(祈禱)· 주송(呪誦)이 방편이기는 하나,

화두를 수단으로 삼는 선(禪)은 방편중의 방편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방편인 선은

수단인 화두를 일념(一念)으로 순일(純一)하게 지닌다는 그 사실이,

지극히 엄숙하면서, 지극히 분명하고,

지극히 정묵적(靜默的)이면서, 지극히 독선적(獨善的)이다.

지극히 엄숙하기에 스승을 섬기고,

지극히 분명하기에 집을 뛰쳐 나고,

지극히 정묵적이기에 은정(恩情)을 끊고,

지극히 독선적이기에 세연(世緣)을 등지는 것이니,

내일의 대성(大成)을 위하여 돌진하는 승가풍(僧家風)의 모습이다.

 

속세(俗世)와는 동떨어진 승가풍이니,

이를 가리켜 몰인간성(沒人間性)이요 몰사회성(沒社會性)이라고

평(評)하는 사람도 있다.

 

은정을 끊음은 뒷날에 그 은정으로 하여금

한 가지로 보리도(菩提道)를 증득(證得)하기 위한 우선의 끊음이요,

세연을 등짐은 뒷날에 그 세연으로 더불어

같이 열반계(涅槃界)로 이끌기 위한 우선의 등짐이란

의취(義趣)를 모르기 때문이지만,

 

실로 화두를 순일(純一)하게 가지는 데는

혈연을 향하여 눈을 돌리고 세간을 향하여 귀를 기울일 틈도 없거니와

또한 있어서도 안 됨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거사풍(居士風)은 그렇지가 않다.

인간성이기 때문에 가정을 꾸미고

사회성이기 때문에 세간(世間)을 가꾼다.

가정을 꾸미기 때문에 오늘을 살면서 내일의 안정을 걱정하고,

세간을 가꾸기 때문에 오늘을 엮으면서 내일의 번영을 꾀하기 위해 시간을 쏟는다.

 

이러히 시간을 쏟기 때문에

아무리 생사의 뿌리를 캐어내는 좋은 수단이요 방편이라 할지라도

24시간 모두가 공부를 지을 수 있는 승가풍과는 달리

24시간 모두가 가정을 꾸미고 세간을 가꿔야만 하는 거사풍으로서는,

화두를 순일하게 지닌다는 것이 지극히 어렵다기 보다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럴진댄 무엇보다도 시간적으로 용납이 안된다.

 

하여서 생사문제의 해결을 포기함이 옳을까?

안될 말이다!

생사문제의 해결을 포기함이란 바로 인생을 포기함이니,

도대체가 인생이란 무엇이며 어떠한 존재인가?

 

천하의 양약도 내 몸에 해로우면 독약이요,

천하의 독약도 내 몸에 이로우면 양약이니,

화두도 이와 같아야

그 분수에 따른 복력(福力)과 신념, 지혜, 용기, 의단(疑團)과의

알맞은 조화가 이루어진다면

즐거운 열반락(涅槃樂)을 증득하는 양약(良藥)이 되려니와,

만약 분수대로인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평생을 그르치는 독약(毒藥)밖에 안 될 것이니,

 

이에 독을 독으로 다스리듯이

운명적인 거사풍이라 한탄하지 말고,

이 시점에서 거성(去聖)의 혓바닥에서 뛰쳐나온 화두는

도로 거성의 혓바닥을 향하여 되돌려 보내되,

이에 대치법(代治法)을 과감히 세워야 할 책임을 느껴야 한다,

 

무슨 뜻이냐?

사회문물의 발달에 따라 생활면의 각 분야는 분주하다.

이 분주한 생활선상에서 얽고 얽히인 인생인지라

화두를 순일하게 가질 수 없는 그 책임은 뉘라서 져야하는가?

선지식이 져야한다.

선지식이 지지 못한다면 뉘라서 져야하는가?

부처님이 져야한다.

부처님이 지지 못한다면 뉘라서 져야하는가?

내가 져야한다.

필경에는 내가 져야하기 때문에 과감하게 대치법(代治法)을 세우는 것이다.

 

대치법(代治法)이란 이렇다.

"연(緣)에 따르는 바깥 경계를 굴리고 또한 경계에 굴리이는 것은,

실로 나의 무상신(無相身)이 그 심기(心機)의 느낌대로

무정물(無情物)인 색상신(色相身)을 걷어잡고 행동으로 나툰다"는

도리를 깊이 인식하고,

"모습을 잘 굴리자"라는 말귀를 세워서 나아가자는 뜻이다.

 

거성(去聖)의 화두가 말귀이고 대치법도 말귀일진댄, 무엇이 다른가?

말귀는 말귀이나 말귀로서는 같지 않은 말귀이니

그 말귀를 굴리는데 따른 수단의 좌표(座標)가 다르고,

그 수단의 좌표가 다르기 때문에 방편의 초점도 다르기 마련이다.

 

무슨 까닭으로서이냐?

예를 들어서

만약 핸들을 돌리고 키를 트는 데도 잘 돌리고 잘 틀어야 할 것이니,

"모습을 잘 굴리자 "라는 말귀와는 통하여서 그 실을 거둘 수가 있겠으나,

화두가 순일하여서는 또한 잘 안될 것이다.

 

사리(事理)가 이러하니,

학인들은 거사풍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서,

아침에는 "모습을 잘 굴리자"라는 뜻으로 세간에 뛰어들고,

낮에는 " 모습을 잘 굴린다"라는 뜻으로 책임을 다하고,

저녁에는 "모습을 잘 굴렸나"라는 뜻으로 희열(喜悅)을 느끼고,

 

시간을 얻어서 앉을 때는

나는 "밝음도 아니요 어둠도 아닌(非明非暗) 바탕을 나투자"라는 여김으로

삼매(三昧)에 잠길 줄을 알면,

이에 따라 깨친 뒤의 수행도

또한 "모습을 잘 굴리자"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이 마음을 도사려 가다듬음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사리를 따져서 알아 믿으면 어려운 일도 아니다.

법은 본래로

쉽다는 생각이 생기기 때문에 어렵다는 생각도 생기는 것이요,

어렵다는 생각이 생기기 때문에 쉽다는 생각도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하여서 법을 굴리려 할진댄

쉬운 것은 쉬운 대로, 어려운 것은 어려운 대로 되돌린다면,

필경에는 쉽지도 않기 때문에 어렵지도 않을 것이요,

어렵지도 않기 때문에 쉽지도 않을 것이니,

쉽고 어려움을 어디에서 찾으랴!

 

애오라지,

이 법은 깨친 앞이라 하여서 쉬운 것은 아니니,

깨친 뒤라 하여서 어려운 것도 아니요,

깨친 뒤라 하여서 쉬운 것이 아니니,

깨친 앞이라 하여서 어려운 것도 아니기에,

 

그만 그대로

"모습을 잘 굴리자"라는 말귀와 "바탕을 나투자"라는 말귀로 하여금

오전수행(悟前修行) 곧 "앞닦음"과

오후수행(悟後修行) "뒤닦음"을 한가지로 굴려가자는 것이다.

 

되돌아 보건대

이 대치법은

자타(自他)의 공덕을 이루는 수단도 되겠지마는

사회의 풍조를 다스리는 방편도 될 것이니

어찌 금상첨화(錦上添花)가 아니랴!

 

어즈버야, 이 도리는 화두가 아니면서 곧 화두요,

화두이면서 곧 화두가 아닌 "새말귀"라 이르겠으니,

바로 가리사(家裡事)를 안 놓치고 도중사(途中事)를 굴리며,

도중사를 굴리되 가리사를 안 놓치는 소식이라 하겠다.

 

이렇듯이 하나인 목적을 향하여 하나인 사명을 다하는 데도

그 수단과 그 방편이 그 때와 그 곳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승가풍에서는 그 학인으로 하여금 슬기를 살피고 신념과 정진력을 참작하여서

화두를 주는 것이 상례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마는 거사풍으로서의 대치법은,

첫째 설법을 통하여

     일체 만법(一切萬法)인 상대성(相對性)은

     본래로 흘연독존(屹然獨尊)인  절대성(絶對性)의 굴림새라는 그 사실을

     학인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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